2009년 9월 2일 수요일

수능과 특례입학 그리고 적성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입학사정관제란 쉽게 풀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합격자를 기존의 국영수와 같은 체계적이지만 제한적인 몇 개의 과목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적성을 고려한 면접으로 평가하는 제도이다.

 

 대다수의 의견은 올바르게 이용한다면 좋은 제도가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언제나 이론은 그럴듯하지만 이사회에 그 제도를 올바르게 이용하는 것들이 얼마나 적은가??)

 어쨋든, 이런 좋은 안건하에 몇몇은 그 특례입학이란걸 굉장히 증오하는 구석이 보였는데,

이들의 논리는 이렇다.

 

수능이 가장공평하다. 수능은 노력하면 결실이 보이기 때문에 가장 정직하고 가장 공평하다.

 

 

 내가 보기에는 이들의 논리는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저 그냥 '고등학교 때 별다른 꿈도 없이 주위에서 공부하라니까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다가 대학교를 갔는데 경시대회에서 입상한 특례로 입학한 아이를 보고 자신이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허무해져서 이유 없이 그들을 증오하는 족속' 이랄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긴 너무 비약적이고 너무 일반화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억측이라고 치부한다 한들 그 이유를 증오를 품고 있는 그들에게 물으면 선뜻 대답조차 하지 못하니.. 내심 저런 마음이 들어서가 아닐까..

 

 나의 이 잘난 억측을 이야기 하기전에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왜 남이 잘되는 것을 배아파 하는가?

 적은 나이라 한들, 필자가 살면서 세상을 가만히 지켜보고 객관적으로 고찰해본바..

 경쟁심이라는 이 녀석이 인간의 본성중 참으로 골치 아픈 녀석이 아닌가 싶다. 이 녀석의 기원을 살펴보면 원시동물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동물 사회에서의 경쟁심이라는 것은 수컷이 수컷과 싸워서 암컷을 쟁취하는 것 그것 자체이다. 어느 동물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러 동물사회에서 보듯이 그 주체가 수컷인 경우도 있고 암컷인 경우도 있지만 인간만큼은 둘다인 것 같다.

 

 허나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고층이 된지 오랜시간이 지났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이 경쟁심이라는 것은 문화라는 단어로 교묘하게 포장이 되어버렸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경쟁심이란 단순한 "인간의 본능중 하나!"로 인식하게 되고 그누구도 기원을 생각하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일부는 제외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 단순한 본능중 하나라고 생각한 이것에도 이러한 바탕이 깔려 있다는 걸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고작 내가 경쟁을 한 이유가 여자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니?" 이러면서 모두 해탈하고 절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ㅋㅋ

 

 아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통의 경우 본능보다 지성과 논리가 지배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경쟁을 통하여 자신의 상대를 정하지 않는다.

(물론 간혹 이 경쟁을 통한 사회계급만을 보고 상대를 정하는 원시적 여성도 있다만은..ㅋ)

인간이기 때문에.. 이 인간은 사랑이라는 무형의 감정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유욕을 바탕으로 사랑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상대를 정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미의 상대를 정하는 것 말이다.. 특정한 목적달성을 위한 것이 아닌..)

 

 

 그러면 사람은 왜 경쟁을 하는가? 미처 말하지 않은 또다른 이유가 있는데 너무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위 계층으로 가고자 하는 욕구 이것이다.

문화의 발전이 낳은 재미있는 것이 계급이라는 것인데. 이는 원시성을 지닌 개인의 물리적인 힘을 통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많은 물리적인 힘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계급이라는 것은 모든 욕구를 충족 시키는데 기존보다 적은 힘을 들게한다. 한마디로 많은 욕구를 충족 시킬 수 있는 것이란 말이다.

 

 다시 복습하자면 경쟁이란 것은 원시적의 의미로는 짝짓기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지만

현재에서 만큼은 계급을 위한 서로간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뭐 어쨋든 안드로메다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말을 하자면 남이 잘되는 것이 배아픈 이유는 내가 계급 상승을 할 기회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질투심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된다. 질투심은 경쟁에서 밀려난 자가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자 다시 돌아와서 말을 하자면..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이놈의 특별 전형 때문에 나의 입지가 좁아 졌다는 것인데..

대학교의 정원이 300명이라 하고 특별 전형을 뽑을 때는 -30명이 되는 것이지 +30명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본다면 수학적으로 계급상승의 기회에는 변동이 없을 텐데 왜 무시를 하는가이다..

 

물론 수학을 잘못해서 증오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와 다른 출신이라서 증오하는 것과 단순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다른 출신이라서 증오하는 것 이것은 이미 잘알려진 일관성의 법칙에 기인한 것이니 생략하겠다. 하지만 이 단순히 무시하는 것은 조금 심각한 것인데, 그이유는 이들이 자기보다 공부를 못했는데 같은 대학교를 들어왔다라는 이 사실만으로 그들을 자신보다 하등한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데 있었다.

 그렇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공부를 왜 해야하는 가를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했느냐와, 공부가 적성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끈기가 있는가? 없는 가에 크게 달렸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단순히 저 3가지의 특성말고도 몇백여가지의 특성화가 더 있는데 그들은 저 3가지의 요소가 현재의 인간사회에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한체 그들을 무시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현재 사회에서 저 3가지 요소가 중요한 부분이긴 하나,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 하지도 않는다. 첫번째 요소는 개인의 성숙성에 따라 달린 것이요, 두번째는 단순한 공부에대한 적성이니 이 또한 필수는 아닌 것이요, 세번째는 단순히 끈기라는 것이 개인의 기호에 따른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다. 즉,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컴퓨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들은 교육제도의 피해자이다.

이놈의 교육제도는 참으로 원시적이다. 사회의 존속이유중 그 사회의 전통성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하지만 이 전통성을 살리기 위해서 썩어가는 대들보를 교체하지 않는 다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인데 이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사람에게는 자그마치 300여가지가 넘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어느 사람은 청각이 좋고, 어떤 사람은 시각이 좋다. 라는 단순한 신체적인 특성을 넘어서서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공간지각능력, 추론력 등등 이러한 가지수를 세분화 시키면 수백가지가 나오고 이것을 통해서 사람의 적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적성은 우리가 추구하는 공동체 사회의 발전과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정도로 효과가 큰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고등학생을 예로 놓고 보면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이렇게 5가지만으로 사람을 등급화 시키고 있다. 이것은 올바른 것인가? 논리와 언변이 뛰어난 변호사보다 국,영,수만 잘하는 바보변호사가 더 우수한가 말이다

이러한 바보 같은 제도하에 그나마 적성이 중요시 되는 사회라고 떠벌리며 전시행정에 급급하여 논술같은 멍청한 시험을 실시하고 비중을 0.5%로 두는 이 바보같은 교육제도는 정말 우습기 짝이 없다.

 

이것을 옹호하는 옹호론자의 변명또한 화려한데,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기초과목이며 우회론적인 학습방법, 두뇌가 아닌 그사람의 노력과 열정을 알아볼 수 있는 시험 등등 아주 멍청한 소리만 골라한다. 현재의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기초과목이 될 수 있는 것은 맞다. 왜냐하면 지금의 사회구성원들은 그교육제도를 토대로 교육 받았으니.. 국영수를 가르치는 사회에서 국영수가 사회에 깔리는 것은 당연한거 아닌가? 오늘부터 전 학생에게 컴퓨터과목만 가르친다고 해도 20년 뒤에는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기초과목이 컴퓨터가 될 것이다. 게다가 우회론적인 학습방법을 들먹이는 멍청이는 그냥 국민의 기초 상식선을 아예 깔아뭉게자라고 주장한적도 없는 나에게 동문서답을 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단순한 암기과목들을 병렬한후 이 학생이 이것을 얼마나 잘 외우고 얼마나 오래 책상에 앉아 있는 가를 통해 그사람이 사회에 나가서도 얼마나 참된 일꾼이 될 수 있는가를 알수 있다라는 이런 논리는 그냥 수능날 애들 잡아놓고 고문해서 가장 오랫동안 버티는 학생일 수록 우수한 학생이라는 논리와 별반 다를바가 없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개인성과 특별성은 존중이 되어가는 분위기인데 이놈의 교육제도는 아직도 60,70년대를 답습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학생의 제각기의 자질을 알아보고 하는데 드는 비용과 인건의 부족을 변명하기 전에 어떻게 개선 의지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침내 멍청한 시행착오와 수많은 전시행정 끝에 비슷하게나마 시도가 보여서 기뻐했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3가지의 특성화에 적합되어 있는 자들이 사회가 바뀌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훼방을 놓는데는 정말 짜증을 이루말할수 없다.

 

 지금의 좋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이러한 대학생들도 대다수는 좋은 대학교를 가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 공부가 적성에 안맞다 하더라도 힘들게 공부한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들은 그때 좀더 성숙하고 왜 공부를 해야하는가 이해를 했기 때문에 이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계급상승의 기회는 그때 한번으로 끝나야 하는가? 이 기회라는 것은 당신들이 정한 선 안에서 끝내야하는 것인가?

 

 아니다. 기회는 언제든지 존재해야한다. 그것이 사회에 더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기회가 단일성으로 끝나버린다면 기회를 잡은 자는 안주할 것이고 잡지 못한자는 포기할 것이다. 물론 이 대한민국에 단발성 기회로써 수능 이후에 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문틈 조차 너무 좁은 것은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회를 언제든지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이 사회에 그것이 실현 가능한가? 독재라면 가능하겠지만 현재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다른 차선책이 있다.

 개인의 적성에 부여하여 대학교를 간다면 정말 그들의 순수한 재능에 따라 분별이 되어질 것이다. 우수한 재능을 지닌 학생일 수록 우수한 학교에 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함정이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아는가? 그렇다. 재능만으로 사람을 분류한 대학교들은 다시 안주하는 천재들과 노력하는 바보들로 인해 평준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는 기회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을 보라 현실은 어떠한가?

 국영수라는 제한적 암기능력에 세뇌되어 버린 아이들은 그저 성공이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 삶의 이유와 꿈조차 깨닫지 못하고  성적에 맞춰서 원서를 넣게 된다... 그들이 정말로 옳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가? 잘 생각해보라. 과연 그들이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를..

 

 나도 그랬으니 너도 그래라는 이 무의미한 답습은 당신들이 원하는 꿈의 사회를 건설하기에 너무나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관습이다. 우리는 지성인으로써 이를 탈피해야한다. 다음세대는 조금더 좋은 세상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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